김용배 (19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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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용배는 1921년 4월 17일에 태어나 1951년 7월 2일에 전사한 대한민국의 군인이다. 문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지원병으로 복무했으며, 국방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다. 6·25 전쟁에 참전하여 춘천 지내리 전투, 동락리 전투 등에서 공을 세웠으며, 압록강 초산 점령에 기여했다. 7사단 5연대장으로 양구 군량리 지구 전투 중 전사하여 준장으로 추서되었고,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1972년 국립서울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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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배 (1921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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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명 | 김용배 |
현지어 표기 | 金龍培 |
로마자 표기 | Gim Yong-bae |
출생일 | 1921년 4월 17일 |
사망일 | 1951년 7월 2일 |
출생지 |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문경 |
사망지 | 대한민국 강원도 양구군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장군 묘역 1-52 |
군사 경력 | |
소속 | 대일본제국 육군 대한민국 육군 |
복무 기간 | 일: 1938년 - 1945년 한: 1948년 - 1951년 |
최종 계급 | 일: 조장 한: 육군 준장 (1계급 특진 추서)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한국 전쟁 |
지휘 | 제6사단 7연대 1대대 제7사단 5연대 |
서훈 내역 | 태극무공훈장 추서 |
2. 생애
1921년 경상북도 문경시에서 태어나 문경보통학교(현 문경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떠났으나, 가정 형편으로 귀국하였다. 1938년 일본군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복무 중 광복을 맞았다. 1948년 국방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 6·25 전쟁에 참전하여 춘천 지내리 전투, 압록강 초산 점령 등 주요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1951년 강원도 양구군에서 중공군과 교전 중 전사하였으며, 사후 준장으로 추서되고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2. 1. 초기 생애 및 일본군 복무
1921년 4월 17일 경상북도 문경시 호서남면 흥덕리에서 태어났다. 문경보통학교(현 문경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야마구치현 농업학교에 유학 갔으나 가정 형편 때문에 중도에 귀국하였다. 1938년 12월 일본군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함경북도 나남에서 3년 6개월 동안 복무하고 귀향하였다. 1945년 6월 관동군에 재소집되어 복무하다 광복을 맞이하였다.2. 2. 대한민국 국군 임관 및 6.25 전쟁 참전
1948년 국방경비사관학교 5기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다. 6·25 전쟁 초기 1950년 6사단 7연대 1대대장(소령)으로 춘천 지내리 전투에 참가했고, 국군의 북진 당시에 압록강 초산에 가장 먼저 진출하여 점령하는 전공을 세웠다.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 제6사단 제7연대는 춘천 방어를 담당했으며, 조선인민군 제2군단에 맞서 선전하며 질서 정연하게 후퇴했다. 같은 해 7월,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제7연대가 조선인민군 제15사단 제48연대를 섬멸한 동락리 전투는 한국군에게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대승리였으며, 이에 기여한 김용배는 중령으로 진급했다. 인천 상륙 작전을 거쳐 총추격 국면으로 전환되자, 제7연대는 제6사단의 선봉으로서 묵묵히 중·조 국경을 향해 돌진했다. 10월 25일 국경 도시 초산을 점령하고, 압록강가에 태극기를 꽂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헌상할 물을 긷었던 것은 바로 김용배가 이끄는 제7연대 제1대대였다.
1951년 7월 2일 7사단 5연대장(대령)으로 강원도 양구군 군량리 지구에서 중공군 5군단과 교전 중 전사하였다.
2. 3. 전사
1951년 7월 2일 7사단 5연대장(대령)으로 강원도 양구군 북면 도평리 고지에서 중공군과의 전투를 독려하던 중 포격을 받고 전사하였다.사후, 태극무공훈장을 추서받고, 육군 준장으로 진급했다. 묘소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다.
3. 사후
사후에 준장으로 1계급 특진했으며,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1972년 국립서울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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